[커플/없음] 만약 당신이…… - 없음

written by. 아스카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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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6.03.24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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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12.14 update(정확한 날짜 모름)
* 디딤돌 문학 <상> 황순원 '학', 표현하기


지금부터 20년 뒤 나는 경찰이 되어서 담당구역을 순찰한다. 그러던 중 우연히, 위독한 아내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남의 집 담을 넘어 도둑질하는 친구를 잡게 된다.


컴컴한 골목길. 듬성듬성 있는 가로등만이 희미하게 내 갈 길을 비춰준다. 쥐가 지나가면 그 발소리도 들릴 것처럼 조용하다. 이것들이 마치, 현실과는 거리가 먼, 환상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이곳은, 지극히 현실적인, 주택가이다. 나는 지금 이곳을 순찰하고 있다.
이곳을 순찰할 때면 항상 생각이 많아진다. 이곳이 '환상 속과 같다.'라 여겨져서인가. 평소에는 잊고 살았던, 허황되거나 개인적인 것들이 많이 떠오른다. 오늘은 갑자기, 내가 경찰이 되고자 했던 이유가 떠올랐다. 경찰인 지금보다도, 더 정의로웠던 그 시절. 부정부패와 맞서기 위해 경찰이 되고 싶었던 내가 있다. 꿈은 이뤘다. 그러나 완벽히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바라던 대로 경찰은 됐다. 그렇지만, 내가 궁극적으로 바랐던 것엔 도달하지 못한 것 같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입 안이 썼다. 원래 크면 다 이런 건가.
이런 생각을 하며 골목길 귀퉁이를 도는데, 한 블록 앞에 있는 집, 그 집의 담을 넘어 들어가는 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행색을 보아하니 도둑 같아, 그 사람이 다시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 사람이 진짜로 도둑이면 다시 나올 것이다. 내 추측은 맞았다.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아 그 사람이 집에서 나와 다시 담을 넘었다. 나는 발소리를 죽이고 조용히 그 사람에게 접근했다. 다행히도 그 사람은 아직 나를 못 발견한 것 같다. 한 걸음 한 걸음 조심히 다가가 그 사람을 확 덮친 다음, 그 사람의 한쪽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당신을 가택 무단 침입 죄로 체포합니다. 당신은 묵비권을……. 어?"

그리고 미란다 원칙을 외려 했다. 그러나 나는 그 사람의 얼굴을 본 순간 더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은 내 친구였다. 고등학교 때는 전교 1, 2등을 도맡아 하더니, 결국 S대 통계학과에 합격했던 녀석이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도 과탑을 했다 들었다. 그 뒤로는 그 어떤 연락을 하지도 소식을 듣지도 못 했던 녀석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더 궁금했다. 서른여덟. 도대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지금 여기에 이 애가 있는 것일까.

"……."
"……."

궁금했지만, 쉽사리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무슨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건 저쪽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 애도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지금 우리 둘의 모습에 다른 점을 말하라면, 나는 그 애를 뻔히 바라보고 있고, 그 애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는 점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럴 때마다, 나는 내가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면 하고 바란다. 그럼 내가 말하는 게 더 편할 테니.
우리 둘의 침묵은 계속됐다. 한 5분쯤 흘렀을까. 나는 '안 되겠다.'란 생각에,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얼마 전에 말이야, 내가 아는 사람이 내게 상담을 요청했어. 자기 큰 애가, 성인인데, 뺑소니를 했다는 거야. 그 사람은 자기 애한테, 자수하라고 했대. 그런데 자신이 말 안 하면 모른다고 하면서 절대 자수를 안 하겠다고 했대. 그 애 태도가, 자신이 뭔 잘못을 했느냐는 듯한 태도여서 미치겠대. 너라면 어떻게 조언해줬을 것 같아?"
"……."

아무 말도 없었다. 그 애는 여전히 같은 모양새로 있을 뿐이었다. 나는, 순찰을 다 마쳐야 한다면서, 좀만 걸으라고 했다. 그 애는 나의 그 말에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천천히 골목을 걸었다. 희미한 가로등 아래 우리 둘의 발소리와 짤랑거리는 수갑 소리만이 울린다. 평소와는 달리, 다른 소리가 더 더해지니, 이곳이 더욱더 비현실적이게 느껴진다. 내가 누군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 난 그저 이 환상 속을 여행하는 여행자일 뿐. 나는 어둑한 하늘에 눈을 두고 다시 말을 꺼냈다.

"말 좀 해라, 내가 너 죽이기라도 하냐?"

그 애가 입술을 깨물었다. 입술을 깨무는 건 그 애의 버릇이었다. 화났을 때 나오는 버릇. 뭐 때문에 화났을까. 보아하니 나 때문에 화난 건 아닌 것 같다. 그 애는, 자신을 화나게 하는 상대가 눈앞에 있으면 바로 달려들었었다. 그러므로 나 때문에 화난 건 아닐 것이다. 아, 혹시 이제는 안 그러려나.

"야, 너 지금 나 밉지."
"……. 아니."
"아니긴, 얼굴에 다 쓰여 있구먼."
"아니야, 네가 왜 미워."
"그럼, 좋으냐?"
"뭐?"

하하하. 그 애가 크게 웃었다. 웃음소리에 분위기가 조금 풀어진다. 그 틈을 타, 나는 고등학교 때 기억을 슬쩍 흘렸다.

"우리 둘이 싸웠을 때 기억나?"
"어, 기억나."
"왜 싸웠는지도?"
"응. 그거, 누구지? 이름은 기억 안 나는데, 어떤 애가 돈 훔쳐간 것 때문에 그랬잖아."
"맞아. 그 옆 반에 어떤 날라리였는데, 걔가 우리 반 애 돈을 훔치는 걸 봤었지. 넌 그걸 보고 선생님께 말해야 한다고 했고, 나는 그냥 걔한테 말해서 돈을 돌려놓으라고 하자고 했지."
"……."
"우리 둘이 싸우느라 결론을 못 짓고 있었는데, 걔가 선생님께 걸려서 혼났지. 돈도 돌려주고."
"맞아, 그랬어. 그때, 일이 그렇게 끝나버려서, 우리 둘이 한동안 어색하게 지냈잖아."
"그러다 언제지? 모의고사 때지? 그때 야자 빠지려고 할 때 다시 화해했지?"
"맞아 맞아. 그렇게 쉽게 풀릴 거 왜 계속 어색하게 지냈는지 몰라."
"솔직히 그게 그렇게 어색해질 일도 아니었지. 그렇지 않아?"
"맞아."

고등학교 때의 기억에 웃던 그 애가 얼굴을 살짝 굳혔다. 그걸 본 나는 아무 말 않고 걷기만 하였다. 골목길의 침묵을 깨는 발소리 두 개와 여전히 희미한 가로등.

"사실 말이야."

드디어 그 애가 먼저 운을 띄웠다. 나는 조용히 그다음 말을 기다렸다.

"몇 년 전에 결혼했어. 같은 회사 동기였는데, 첫 애를 임신하고 나서 회사를 그만뒀어. 말이 그만둔 거지, 쫓겨났어. 알잖아, 그런 거. 아내가 나한테 아주 미안해하기에 내가, 그래도 내가 돈을 버니까 괜찮아, 이랬지."
여기까지 말한 그 애는 잠시 말을 멈추고 입술을 살짝 물어뜯었다.
"근데, 나마저도 회사에서 잘렸어. 경기불황 때문에 사원 정리가 있었거든. 애까지 있으니까, 회사 잘리고 나서 한동안은 미치도록 힘들었어. 그런데 거기다 아내가 유방암까지 걸린 거야. 아내 수술비 마련해야 하지, 애도 키워야지, 그런데 돈은 구할 방도도 없지……."
"그래서?"
"그래서…! 홧김에 도둑질을 감행한 거지……."

그 말을 듣고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얼마쯤 침묵을 유지하다 걸음을 멈췄다. 한 걸음만 앞으로 나아가면 큰길이다. 시끄러운 소리와 환한 불빛이 있는 곳. 나는 시선을 큰길가에 두고는 말을 했다.

"내가 아까 질문했던 거 기억나? 생각해 봤어?"
"잘, 모르겠어……."
"너무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난 신고하라고 조언해줬어."
"……."

시끄러운 소리와 환한 불빛이 나를 현실로 인도한다. 밝은 불빛을 바라보며, 시끄러운 소리에 귀를 맡기고, 그 애의 귀에만 들릴 정도로의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을 가택 무단 침입 죄로 체포합니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으며 법정에서 불리한 진술에 대해 입장을 거부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 애가 다시 고개를 떨어뜨린다. 찬 바람이 온몸을 식혀준다.


그리고 다음날, 인터넷에 이런 기사가 났다.

30대 남성, 아내 수술비 때문에 도둑질하다 덜미 잡혀.

아내의 수술비를 마련할 길 없어 돈을 훔친 한 30대 남성이 경찰에 붙잡혔다.
서울 00 경찰서는 13일 방범이 허술한 한 주택의 담을 넘어, 창문 방충망을 뜯어내고 들어가 현금 100만 원을 훔친 혐의(특수절도)로 박 모(38)를 불구속 입건했다고 밝혔다.
순찰을 하던 경찰이 주택의 담을 넘는 한 남성을 이상하게 여겨 기다렸다가 그 남성이 다시 담을 넘어서 도로 밖으로 나오자 체포를 했다고 한다.
박 모 씨는 아내가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직장에서 내쫓기기까지 한 상태라 돈을 마련할 길이 없어 도둑질했다고 자백했다고 한다. 한편, 박 모 씨 아내의 수술비는 13일 낮,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사람에 의해 해결이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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